그리스도인 일치운동이란?

그리스도인 일치운동이란?

개요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을 그리스도인 일치운동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는 체계를 갖추기 이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전 세계를 향해 퍼져나갔는데, 그런 과정에서 다양한 모습이 나타났음에도 ‘교회는 하나’라는 공감대가 있었다. 교회가 ‘에큐메니칼’ 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로마제국 시기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온세계 그리스도교를 모아 회의를 개최했는데, 당시 세계 그리스도교를 지칭하는 일반 용어였던 ‘에큐메니칼’이란 단어를 도입하여 ‘에큐메니칼 공의회(Ecumenical Council)’라 칭하면서 시작되었다.

에큐메니칼은 세상, 특히 인간이 거주하는 세상이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오이쿠메네oekumene’라는 단어에서 왔다. 이것이 세계 그리스도교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면서 전 세계의 그리스도교라는 의미가 되었다. 그리스도인 일치운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귐과 신앙의 고백을 통해 창조세계를 정의롭고 평화롭게 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협력의 모든 활동을 말한다.

방향

에큐메니칼 운동은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각각의 전통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온전한 사귐을 추구하며, 나아가 이러한 사귐과 연대가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정의롭고 평화롭게 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지향한다.

이 두 갈래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의 일치를 이룬 교회들의 선교 협력을 통한 정의, 평화, 창조세계의 보전을 위한 실천으로 자연스럽게 수렴된다.

역사

일곱 번의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통해서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등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신앙고백이 확정된다. 그리스도교는 1054년 동서방교회의 분열, 16세기에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에 이어 개신교의 다양한 분파가 생겨났다. 교회의 많은 분열과 함께 17세기에는 인문학의 발전 등에 따른 절대 권력의 붕괴, 지리적 발견으로 다양한 문화를 접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는 경직된 정통주의를 극복해야 했고, 지평선이 넓어짐에 따라 파생된 많은 문제를 접하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에딘버러 국제선교대회와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18, 19세기 신앙각성운동에 따라 많은 선교지가 개척되었다. 선교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극복하고 선교지에서의 교파를 초월한 협력이 자연스레 논의되었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인 일치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1910년 에딘버러 국제선교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선교, 복음증거, 봉사, 연합 등의 개념들을 재정의하는데 에큐메니즘(Ecumenism)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Conference)
선교대회는 교파적 특성에 따른 문제를 토의하지 않기로 전제된 모임이었지만 일부 대표들은 이를 솔직히 드러내고 교회 내부에서 신학 대화와 교제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토대로 미국 감리교회는 신앙과 직제의 문제를 토론할 세계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고 1927년 스위스 로잔에서 제1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가 개최되었다. 10년 뒤인 에딘버러에서 제2차 신앙과 직제 대회가 열렸을 때는 보다 깊은 교파 간 이해가 조성될 수 있었다. 에딘버러 대회는 신앙과 직제와 삶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을 통합하기로 합의했고, 1948년에 세계교회협의회에 속하게 된다.

삶과 봉사(Life and Work)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교회들은 사회적 책임을 심각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스웨덴 웁살라의 감독 죄더볼륨은 전쟁에 그리스도교 국가 혹은 그리스도교가 여러 모양으로 관여된 악행을 통감하면서 그리스도교는 화해자로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역설하며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 세계그리스도교대회를 제안했다. 1925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1차 삶과 봉사 대회는 가톨릭교회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도교회 대표들이 참여하였고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연합의 필요성을 천명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라”는 주제로 모인 제2차 삶과 봉사 대회는 정치, 사회, 경제, 정의 실현을 교회의 선교 과제로 선정하였는데, 사회, 정치 문제는 근본적으로 종교문제라고 선언한 것이고, 책임을 수행함에 있어서 평신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의 탄생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이 제안되었듯이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세계교회연맹이 제안되었다. 많은 논의 끝에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의 창립과 함께 신앙과 직제, 삶과 봉사가 통합되었고, 1961년 뉴델리에서 열린 3차 총회에서 국제선교협의회가 합류하였다.

로마 가톨릭
개신교와 정교회가 세계교회협의회에 참여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끌어 온 것처럼, 로마 가톨릭도 교회의 갱신과 교회의 일치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다. 이 노력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열매를 맺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세계교회협의회까지 논의되고 토론한 내용과 상이하지 않았다. 유럽을 제외한 제3세계 교회들이 경험한 식민지의 약탈과 착취는 제국주의 이후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억압은 이어졌다. 사목적 입장에서 주교들과 세제들은 지배세력에 저항하였고 민중의 편에 서서 해방을 주창했다. 유럽 중심의 가톨릭교회가 온 세상의 교회로 거듭나는 획기적인 전환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만들어졌다. 특별히 교회일치와 관련해서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그리스도교 일치 증진을 위한 사무국(Secretariat for the Promotion of Christian Unity)’을 설립했고 후에 평의회로 격상되었다.